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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martial artist) 곽원갑은 누구인가?

YH, jAcoB 2006. 3. 6. 09:51
출처: YBM Sisa.com

중국이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중화제국을 유지해 온 중국은 19세기 중반 이후에 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외세에 대항해 여러 차례 전쟁을 치루었지만, 정예화된 함대와 군사들을 이끌고 온 외국에 연이은 패배를 당하는 치욕을 경험했다. 19세기말에는 외세의 압력이 더욱 가속화되었고, 대륙풍의 중국인들은 자존심을 구기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이런 시기에 홀연히 나타나, 금발의 외국 권투선수, 각종 격투기 전문가, 일본인 사무라이 등을 사람들이 운집한 이벤트에서 차례로 쓰러트린 전설적인 무인(martial artist)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곽원갑(Huo Yuanjia)'이다. 사막을 왕래하는 보부상(caravan)들을 전문으로 경호해 온 집안에서 1868년 태어난 그는, 12살에 부친으로부터 무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경호업무를 맡아오던 곽원갑의 집안에서만 배울 수 있는 '미종예'라는 무술이었다. 22살이 되던 1890년, 쿵후의 달인이라 불리던 한 무인이 곽원갑의 부친 집을 찾아온 일이 있는데, 곽원갑은 미종예를 무시하던 그와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를 개기로 인근에 곽원갑의 명성이 퍼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중국인들 사이에서 곽원갑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01년, 러시아의 레슬러와의 한 판이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중국인을 멸시하고 모욕하기를 일삼았는데, 그와 대적할만한 중국인이 나타나지 않았기에 오만함도 높았다. 곽원갑은 오만한 러시아 레슬러를 단숨에 이겼으며 그로부터 진정한 승리자란 찬사까지 받아낸다. 억눌려 지내던 중국인들에게 곽원갑은 중국의 자존심을 살려낸 국민적인 영웅이 된 것이다.

1909년에는 자신의 제자와 함께 상하이로 가서 외국 무도인들과 공개적인 대결을 벌렸다. 이와 동시에 상하이에 '중앙정무체육회'라는 무술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영화배우 이소룡이 주연한 '정무문'의 배경이 되는 학교이기도 한다. 곽원갑은 이듬해인 1910년, 중국을 지배하던 4대 강국인 프랑스, 영국, 러시아, 일본에서 보낸 최고의 무술고수 1명씩과 대결을 벌여 승리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중국인의 가슴에 영원한 우상으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그는 사망하게 된다. 일부에서는 독살설이 돌았지만, 황달(jaundice)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무인 곽원갑(Fearless)'은 그의 무술 대결을 중심으로 곽원갑을 픽션(fiction)을 가미하여 재조명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곽원갑이 유일한 자식이 죽어 자손이 없는 상태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의 자손이 번창했다고 한다. 이는 얼마 전 곽원갑의 증손자가 영화의 부정확성을 사과하라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드러난 사실이다.